수호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1821 ~ 1846)

1821년 8월 21일 충남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앙깊은 순교자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열심한 신덕으로 생활 하던중 1836년 모방신부의 도움을 받아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은 김대건은 1844년 12월15일 페레올 주교로 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음해 1월15일 귀국, 서울에 도착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 있었지만 김대건은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해 4월 주교와 신부를 맞기 위하여 상해로 간 김대건은 상해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1845년 8월17일) 그후 홀 주교와 다블뤼(安)신부를 모시고 상해를 출발한 김대건 신부는 40여일에 걸친험난한 항해 끝에 1845년 10월12일 나바위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곧 서울로 올라와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행했는데 그의 깊은 신심과 유창한 말씨는 단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처럼 선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준비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김 신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뱃길을 개척하던 중 1846년 6월5일 백령도 부근 순위도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앞에서 자신이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 감사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해박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고자 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김 신부는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 2매를 번역 작성했고 지리개설지도 편술했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때 김대건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김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 1925년에 복자(福者)가 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백2명과 함께 성인(聖人)품에 올랐다.